코로나19발 팬데믹 이후 사람들은 단순히 여행을 가는 것을 넘어 특정 장소의 감성과 라이프스타일을 일상 속에서 경험하려 하며 특히 서울은 글로벌 문화 소비의 상징적 공간으로 부상했다.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한국적 장소감은 음식·패션·생활양식 등으로 세계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처럼 물리적 이동 없이 형성된 장소감이 여러 지역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동시에 구현되는 현상을 ‘포터블 멀티로컬리티’라 부른다.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이 시청·참여·모방·재생산의 순환을 촉진해 감정적 몰입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장소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에 한국적 공간이 제공하는 경험을 세세하게 설계하고 콘텐츠 IP와 연계한 오프라인 공간을 구성하는 등의 전략이 효과적일 수 있다.
09 Business Trend Insight
포터블 멀티로컬리티(Portable Multilocality)특정 장소에 대한 경험이 지리적 위치에 얽매이지 않는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 한류의 맥락에서는 한국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전 세계 어디서든 한국이라는 장소에 대한 감각적, 정서적 연결을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음.
물리적 이동이 급격히 제한됐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장소’에 대한 정서적 갈망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진 것처럼 보인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어딘가를 단순히 방문하길 원하는 차원을 넘어서 일상 속에서 특정 장소의 정서와 분위기,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고자 한다. 특히 팬데믹 기간 동안 장소로서의 ‘한국’은 글로벌 대중문화의 중심축으로 부상하며 보편적인 문화 코드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흐름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상징적 공간은 바로 서울이다. 서울은 이제 파리나 뉴욕과 같이 음악, 음식, 패션 등을 통해 세계인들이 각자 살고 있는 공간으로 불러들이고 싶은 감각적 경험의 대명사가 됐다. ‘한국에 가지 않고도 한국을 체험하고 싶다’는 글로벌 소비자들의 욕구는 한류 열풍을 넘어 장소성의 소비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을 둘러싼 문화적 장소감의 확장은 방송 콘텐츠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서진이네’나 ‘어쩌다 사장3’와 같이 해외에서 한식당 또는 한인식품점을 운영하는 콘셉트의 관찰 예능프로그램을 보면 이곳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반응을 통해 ‘한국성(Koreanness)’에 대한 능동적인 수용이 이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로그램 속의 외국인 방문객들은 “한국 드라마에서 쌈 싸 먹는 걸 본 적 있다” “추운 날씨엔 소주를 곁들이면 몸이 따뜻해진다” 등 한식 문화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자연스럽게 나누는데 이는 음식 경험에 대한 설명인 동시에 문화적 해석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음식 외에도 “한국에 갔을 때 많은 사람이 모두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TV 프로그램을 보면 한국인들은 소파가 있어도 바닥에 앉더라”와 같은 언급은 한국에 직접 가지 않아도 미디어를 통해 장소 감각이 학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한인 교포들조차 외국인들의 이러한 반응에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한국에 대한 문화적 인식은 확연히 달라졌다.
한편 디지털 미디어 환경은 한국 문화를 접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글로벌 소비자들은 넷플릭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과 같은 플랫폼의 콘텐츠를 통해 일상적으로 한국인들의 라이프스타일, 주거 및 식문화, 패션, 언어, 심지어 제스처까지도 소비할 수 있게 됐다. 짧은 영상 중심의 콘텐츠 구조는 ‘시청–참여–모방–재생산의 순환’을 유도하며 글로벌 소비자들이 각자의 맥락 속에서 한국성을 번역하고 재구성하도록 돕는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라는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나 콘텐츠의 소재를 넘어 정서적 친밀성과 문화적 몰입의 대상이 된다.
지난 20여 년간 문화적 역량을 세계 시장에 효과적으로 전달한 덕분에 한국성은 이제 경쟁력 있는 문화 자산으로 인정받게 됐다. 서구적 문법과 로컬 감성을 결합한 문화적 혼종성을 내세워 전 지구적 이해 가능성을 넓혀감은 물론 콘텐츠·상품·스타일을 현지 맥락에 맞게 해석함으로써 한국적인 것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다. 여기에 소프트파워 중심의 IP 확장 산업이 더해지면서 비단 ‘국가 브랜드’가 아닌 독립적인 ‘문화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제 세계 곳곳의 미디어 속에서 한국의 쌈이나 치맥 문화를 따라 하고 K뷰티 루틴을 일상에 들여놓는 건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더 나아가 해외 도시에 한국의 인기 브랜드 매장이 유치되거나 현지 인플루언서가 K라이프스타일을 재현한 팝업 공간을 선보이는 사례도 종종 눈에 띈다. 이는 ‘한국에 가지 않고도 한국을 경험하고 싶다’는 새로운 형태의 욕망이 미디어를 통해 구체적인 비즈니스 기회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 아티클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포터블 멀티로컬리티(Portable Multilocality)’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포터블 멀티로컬리티’란 무엇인가?포터블 멀티로컬리티는 특정 장소에 대한 경험이 더 이상 지리적 위치에 얽매이지 않는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전 세계 어디서든 한국이라는 장소에 대한 감각적, 정서적 연결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두 가지 핵심 요소로 나뉘는데 우선 ‘포터블’은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장소에 대한 감정적 유대가 물리적 이동 없이 다른 지역으로 전이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멀티로컬리티’는 전이된 하나의 장소감이 여러 다른 지역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동시에, 그리고 중첩적으로 구현되는 양상을 가리킨다. 즉 특정 장소의 고유한 감각과 경험이 마치 ‘휴대(portable)’ 가능해져 ‘여러 지역(multilocality)’에서 동시에 발현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포터블 멀티로컬리티를 이해하려면 먼저 장소성이 더는 고정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디지털 미디어로 문화적 경계가 흐릿해진 오늘날 장소의 감각은 액체처럼 유동적으로 변하고 확장된다. 과거의 장소성이 특정 영토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면 이제는 K콘텐츠 같은 매개체를 통해 전 세계 어디에서든 접속하고 소비하며 재창조되는 다중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가령 ‘오징어 게임’을 본 뉴욕의 팬이 자신의 집에서 달고나를 만들고 파리의 팬들이 드라마 속 게임을 재현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물리적 장소성을 자신의 공간으로 유연하게 끌어와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내는 행위에 속한다. 이는 로컬리티가 원본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변형되며 새로운 문화적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장소의 유동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미디어 플랫폼의 구조 자체가 강력한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미디어 연구에서는 이를 ‘미디어 어포던스(media affordance)’, 즉 ‘미디어가 사용자에게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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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실시간 스트리밍 기능은 서울의 한 카페에서 열리는 이벤트를 지구 반대편의 시청자가 시차 없이 경험하게 만들어 물리적 거리를 무너뜨린다. 나아가 숏폼 비디오 플랫폼이나 사진 필터는 특정 장소의 분위기를 누구나 손쉽게 따라 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는 놀이로 만든다. 이러한 재현 놀이는 해시태그 챌린지나 밈(meme)의 형태로 바이럴을 일으키며 특정 장소의 문화를 순식간에 전 지구적인 현상으로 확산시키는 폭발력을 보여준다. 결국 온라인에서의 감각적 경험이 오프라인에서의 구체적인 소비나 행동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적 장소감은 서울뿐만 아니라 여러 도시의 일상 속에 다중 실재처럼 생생하게 구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디어라는 동력이 실어 나르는 경험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이는 그저 눈으로 보는 이미지를 넘어선다. 포터블 멀티로컬리티의 핵심은 감정적 몰입을 통해 완성되는 ‘정서적 장소감’이라는 감각의 총합이다. 이 안에는 한강의 야경이나 치맥처럼 특정 장소를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상징적인 코드뿐만 아니라 쌈을 싸 먹거나 한국 특유의 바닥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이 문화를 직접 체화하는 행위적 실천이 함께 담겨 있다. 미디어 이용자들은 이러한 코드와 실천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따라 하면서 ‘나도 그들(현지인)과 함께 거기에 있는 듯한’ 강렬한 정서적 연결과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 감정적이고 총체적인 경험이야말로 물리적으로 그곳에 가보지 않아도 그 장소에 대한 깊은 애착과 소속감을 만들어내는 포터블 멀티로컬리티 현상의 진짜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포터블 멀티로컬리티는 어떻게 구현되는가?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확산되는 한국의 장소성은 전 세계 도시의 일상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며 소비자의 마음속에 자신만의 한국을 구축하게 만든다. 이는 단순히 특정 장소를 모방하는 것을 넘어 그 장소가 품은 감성과 스토리를 분해하고 현지 맥락에 맞게 재조립하는 고도의 전략으로 발전했다. 포터블 멀티로컬리티가 구현되는 방식은 크게 콘텐츠를 통한 장소의 확장, 현지 공간의 감각 재현, 정서적 경험의 장소화라는 세 가지 축으로 나눠볼 수 있다.
1) 스크린에서 일상으로: 콘텐츠 기반 장소 확장영상 콘텐츠는 한국이라는 장소성을 전 세계 잠재 고객의 마음에 심는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인 매개체로 작동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엑스오, 키티’에 등장하는 북촌 한옥마을과 반포대교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의 성장, 로맨스라는 서사와 결합하며 시청자에게 ‘언젠가 저곳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감정적 동기를 부여한다. 마블의 ‘블랙 팬서’에서 부산이 최첨단 가상 국가 와칸다와 현실 세계를 잇는 역동적인 접점으로 그려진 것 역시 단순한 로케이션 제공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영화 속 추격전의 배경이 된 자갈치시장, 광안대교 등은 단순한 관광 명소를 넘어 ‘블랙 팬서의 세계관을 현실에서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고유한 스토리 자산을 획득한다. 또한 글로벌 팬들의 여행 계획에 부산을 각인시키는 강력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확장된다. 가령 글로벌 팬덤을 구축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에서 주인공들이 즐겨 찾던 허름한 국밥집, 몸과 마음을 치유하던 한의원 같은 일상적 공간들은 오히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화려한 랜드마크가 아닌 한국인의 삶의 결이 느껴지는 ‘미시적 체험(micro-experience)’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는 글로벌 소비자들에게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처럼 살아보기’라는 한 차원 높은 경험에 대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나아가 걸그룹 뉴진스의 멤버 하니가 서울의 거리를 배경으로 촬영한 구찌 캠페인이나 종로를 배경으로 한 좀비 아포칼립스 게임 ‘낙원’의 사례는 포터블 멀티로컬리티가 어떻게 고부가가치 비즈니스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패션과 게임이라는 강력한 산업 속에서 서울이라는 장소는 그 자체로 힙하고 흥미로운 서사가 펼쳐지는 무대로서의 가치를 공인받는다. 콘텐츠가 완성된 결과물을 넘어 장소에 대한 정서적 연결을 구축하고 물리적 방문과 소비를 유도하는 ‘경험 설계의 출발점’으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2) 다른 도시 속 ‘작은 한국’:현지 공간의 감각 재현포터블 멀티로컬리티의 진정한 힘은 한국에 와보지 않은 사람도 한국을 체감하게 만드는 능력에 있다. 이는 한국의 지리적 좌표를 떠나 외국 도시 공간에 한국의 감각을 정교하게 이식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최근 입소문을 타고 있는 미국 LA 코리아타운의 한국식 카페를 언급할 수 있다. ‘스태거 커피(Stagger Coffee)’ ‘록 커피 & 티(ROK Coffee & Tea)’ 등의 카페는 한국 프랜차이즈의 분점이 아니라 서울의 성수동이나 연남동에서 볼 법한 미니멀한 인테리어, 개성 있는 음료 및 디저트 메뉴, 심지어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사진 구도와 분위기까지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그 결과 고객들은 음료를 즐길 뿐 아니라 SNS 속에서 바이럴된 ‘서울의 힙한 카페 스타일’을 직접 체험하고 인증하는 행위까지도 소비할 수 있다.
음식은 이러한 장소성의 재현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뉴욕 맨해튼에 문을 연 기사식당 콘셉트의 ‘기사(Kisa)’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단순히 불고기 백반을 파는 차원을 넘어 원형의 스테인리스 쟁반에 빠르게 내오는 반찬, 활기차면서도 정감 있는 분위기와 출입구 앞에 구비된 커피 자판기 등 기사식당이라는 문화적 코드를 인테리어와 서비스, 메뉴에 일관되게 적용했다. 고객들은 음식을 통해 한국의 특정 시대와 문화를 경험하고 이를 SNS에 공유하며 특별한 발견의 즐거움을 나눈다.
홍콩 소호에 부산의 해양 도시 이미지를 차용한 주점이 생기고 일본 도심에 한국 지하철이나 포장마차 콘셉트의 술집이 등장하는 현상 또한 표면적인 인테리어 차원의 모방을 넘어선다. 이는 특정 장소가 가진 핵심적인 감성과 스토리를 추출해 현지 시장에 맞게 재구성하는 콘셉트 비즈니스가 성공한 사례에 해당한다. 또 다른 한국 현지 공간의 재현 사례로 동남아시아 국가에 생긴 ‘한강 라면’ 카페와 포장마차가 있다. 필리핀과 베트남의 라면 카페, 인도네시아의 포장마차 주점 등은 한국 여행 콘텐츠나 드라마 등에서 보아 왔던 문화적 경험 자체를 상품화한 것으로 오늘날 소비자의 감정적 만족감이 음식 자체를 넘어서고 있음을 시사한다.
3) 경험이 곧 장소:몰입형 체험을 통한 감정의 장소화포터블 멀티로컬리티의 최종 진화 단계는 장소의 물리적 형태마저 뛰어넘어 정서적 경험 그 자체가 하나의 장소가 되는 경우다. 해리포터 테마파크인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 투어 도쿄, 스튜디오 지브리의 지브리 파크, 2025년 말 미국에 오픈 예정인 넷플릭스 하우스와 같이 콘텐츠 속 세계관을 오프라인에서 직접 구현하려는 시도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잠재력 있는 비즈니스 트렌드다.
LA, 뉴욕, 마드리드, 시드니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 선보였던 ‘오징어 게임 체험관’ 또한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그저 세트장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속 상징적인 소품, 특유의 조명과 음향, 긴장감 넘치는 게임 룰 속에서 스스로가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되는 완전한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국적과 언어를 초월해 ‘오징어 게임’이라는 강력한 IP가 창조한 가상의 장소에 대한 소속감을 부여받을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흐름이 역으로 ‘본토’의 가치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2025년 2월부터 6월까지 서울 성수동에 문을 연 ‘오징어 게임: 더 익스피리언스’와 ‘오징어 게임’ 시즌 3 공개에 맞춰 서울 광화문에 개장한 팝업존은 전 세계 팬들에게 ‘‘오징어 게임’의 원조 한국에서 경험하는 진짜’라는 독보적인 상징성을 제공했다.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둔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전시 역시 마찬가지다. 팬들은 드라마의 배경이 된 스위스와 한국을 직접 여행하는 대신 도쿄 한복판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의 서사를 다시 체험하며 감흥을 재확인한 바 있다. 이 같은 체험형 비즈니스는 소비자를 수동적인 관객에서 콘텐츠의 참여자로 전환시키고 이 과정에서 소비자의 감정은 특정 장소와 강력하게 결합하며 정서적 경험을 만들어낸다.
포터블 멀티로컬리티의비즈니즈 전략과 시사점지금까지 한국의 로컬리티가 해외로 전파되고 재구성되는 현상, 즉 ‘포터블 멀티로컬리티’의 등장 배경과 개념, 구현 방식을 관련 사례와 함께 살펴봤다. 콘텐츠를 통해 한국이라는 장소의 감각이 확장되고, 해외 현지 공간이 한국적 감각으로 채워지며, 미디어 속 경험이 오프라인에서 재현되는 흐름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포터블 멀티로컬리티의 비즈니스적 활용 방안과 함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장소감과 정서적 몰입을 상품, 서비스 또는 경험으로 연계하는 과정에서 참고할 만한 전략적 방향성은 다음과 같다.
1) 공간을 위한 ‘경험 설계자’가 돼라과거 해외 한식당이 단순히 비빔밥과 불고기를 파는 곳이었다면 이제는 ‘을지로 노포’의 정서나 ‘성수동 카페’의 분위기를 판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포터블 멀티로컬리티 시대의 비즈니스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는 공급자를 벗어나 특정 장소의 감성과 맥락을 총체적으로 설계하는 ‘경험 설계자’가 돼야 한다.
이는 그저 분위기를 내기 위해 인테리어 소품 몇 가지를 가져다 놓는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다. 고객이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갈 때까지 오감을 통해 특정 로컬리티를 온전히 체험하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베를린에 ‘홍대 앞 주점’을 콘셉트로 한 공간을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최신 케이팝과 90년대 가요가 뒤섞여 나오는 스피커의 소음, 초록색 소주병과 양은 냄비가 부딪히는 소리, 네온사인 조명의 번쩍임, 음식을 넘어 주변 테이블의 활기찬 분위기까지 이 모든 요소가 결합될 때 비로소 고객은 물리적으로는 베를린에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홍대를 여행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실행 포인트 브랜드가 구현하고자 하는 한국의 특정 장소를 정의하라. 그리고 그 장소를 구성하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적 요소들을 수집하고 이를 고객 경험의 모든 과정에 어떻게 녹여낼지 구체적인 ‘경험 시나리오’를 설계하라.2) ‘초세분화’된 로컬리티를 상품화하라한편 ‘K’라는 거대한 수식어의 시대가 점차 저물어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지난 4월 발표한 ‘2025 해외 한류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응답자의 약 70.3%가 한국 문화 콘텐츠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동시에 한류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동의한다는 응답도 37.5%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 대비 4.9%포인트 상승한 수치인데 과도한 콘텐츠 공급과 소비에 대한 피로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한국에서 창발한 콘텐츠라는 사실 자체에서 비롯되는 매력은 점차 떨어질 수 있다. 대신 글로벌 소비자들은 이제 한국이라는 막연한 카테고리보다 그 안의 다채로운 결을 탐색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부산의 낭만적인 바다 감성과 서울의 역동적인 도시 감각을 구분하며 전주의 고즈넉함과 강남의 세련됨을 다른 코드로 인식한다. 포터블 멀티로컬리티는 이처럼 잘게 쪼개진 ‘마이크로 로컬리티(micro-locality)’가 새로운 브랜딩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가령 패션 브랜드는 ‘청담동 디자이너 편집숍’의 미니멀하고 세련된 감성을, 뷰티 브랜드는 ‘제주’의 청정한 자연 원료 스토리를, F&B 브랜드는 ‘신당동 떡볶이’나 ‘속초 닭강정’처럼 특정 지역의 오리지널리티를 브랜드 정체성의 핵심으로 내세울 수 있다. 이는 지역 특산물 활용에 그치지 않고 해당 지역이 가진 고유의 라이프스타일과 이미지를 브랜드에 투영하는 고도의 전략이 된다.
실행 포인트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를 넘어 ‘○○○(지역명)에 영감을 받은(Inspired by ○○○)’과 같은 형태로 브랜딩의 초점을 전환하라. 당신의 비즈니스가 추구하는 가치와 가장 잘 맞는 한국의 특정 동네, 거리, 도시를 발굴하고 그곳의 스토리를 브랜드의 자산으로 만들어라.3) 콘텐츠 IP를 ‘오프라인 경험’으로 변환하라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포터블 멀티로컬리티의 강력한 촉매제는 K콘텐츠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본 해외 소비자가 영화에 나온 낙산공원 성곽길을 찾거나 국립중앙박물관의 관련 굿즈를 사듯이 콘텐츠 속 장소와 경험을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이는 비즈니스에 있어 강력한 IP 활용 전략의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드라마에 제품을 노출하는 PPL에서 한 걸음 나아가 콘텐츠의 세계관과 스토리를 현실 공간으로 확장하는 ‘경험적 PPL’을 시도할 수 있다. 예컨대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헌트릭스 멤버들이 먹던 분식과 스낵 메뉴를 이들이 사용했던 대기실을 콘셉트로 한 식당 공간에서 판매한다면 팬들에게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고, 브랜드에는 강력한 스토리텔링과 바이럴 마케팅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해외시장에서 현지 파트너와 협력해 한국 콘텐츠 IP를 기반으로 한 라이선스 사업이나 기간 한정 이벤트를 기획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실행 포인트 현재 인기 있는 혹은 잠재력 있는 콘텐츠 IP를 분석하고 그 안에서 소비자들이 매력을 느끼는 ‘장소’나 ‘경험’의 코드를 추출하라. 이를 어떻게 당신의 비즈니스와 연결해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협업 모델을 구상하라.이상의 비즈니스 전략들은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바로 유형의 제품만큼 장소가 가진 무형의 감성과 스토리가 중요한 자산이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포터블 멀티로컬리티를 둘러싼 논의는 앞으로도 다양한 영역과 방식으로 확장될 여지가 크다.
그중 하나는 한국성을 판단하는 관점이 재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해외 소비자들이 원하는 진정성은 출처만이 아니라 경험의 질과 관련이 있다. 음식 소비에 있어서도 한국에서 볼 법한 타이포그래피의 간판, 금속 수저, 형광등, 네온사인 인테리어까지 포함된 ‘총체적인 경험’을 추구함으로써 ‘진짜 한국’이라고 느낀다.
또 다른 측면에서 포터블 멀티로컬리티는 초지역화된 마이크로 브랜딩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강’ ‘을지로’ ‘명동’ 등과 같은 네이밍에서 한국의 세부적인 지역 단위의 감성을 코드화해 소비하고자 하는 면모가 엿보인다. 과거 전형적인 한국 식당이 그저 ‘Korean Restaurant’이었던 것보다 훨씬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한국의 로컬리티를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이 커졌을 뿐 아니라 관련 브랜딩 또한 그에 맞춰 진화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포터블 멀티로컬리티가 시사하는 바는 특정 장소의 감성이 하나의 키트나 포맷처럼 수출되거나 현지의 상황에 맞게 재조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방식이 가능해진다면 이는 F&B 브랜드의 글로벌 확장 전략 개발과 더불어 잠재적인 한국의 관광자원을 발굴하고 알리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포터블 멀티로컬리티는 일시적인 문화 현상을 넘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브랜드를 구축하며 고객과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해 “고객에게 어떤 장소적 경험을 선물하고 있는가?” “어떤 감정적 소속감을 부여하고 있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한 창의적 해답을 찾는 여정 속에서 한국의 로컬리티는 물론 자신만의 고유한 스토리를 가진 모든 도시와 브랜드가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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