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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현순엽 전 SK하이닉스 기업문화담당 부사장, 『신뢰 게임』 공저

“장기적 초고성과는 천재 아닌 원팀서 나와
경쟁보다 협업 북돋는 신뢰 구조 만들어야”

백상경 | 428호 (2025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성숙기에 접어든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만년 2위’ SK하이닉스는 어떻게 ‘부동의 1위’ 삼성전자를 따라잡는 역사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1차적으로 보면 고대역폭메모리(HBM)라는 혁신 기술에 빠르게 적응한 덕분이다. 하지만 이면엔 조직 내부에서 이뤄진 다양한 혁신과 노력이 있었다. 지난 10여 년간 SK하이닉스 초고성과의 기초를 닦은 ‘톱팀(C레벨 부문장)’의 일원, 현순엽 전 SK하이닉스 기업문화센터장은 신뢰에 기반한 협업 문화가 핵심이었다고 강조한다. 본원적 경쟁력을 끌어올릴 핵심 인재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초고성과는 서로를 믿고 치열하게 협업하는 조직을 통해서만 창출할 수 있다는 게 이유다. AI가 조직 구성원 모두의 능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시대, 이제 조직 구성원 모두가 잠재적 초고성과자다. 한두 명의 천재가 아니라 호기심과 실행력을 갖춘 수백 명의 인재가 협업으로 만드는 집단적 성과를 극대화하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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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국내 산업계는 물론 글로벌 반도체 업계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만년 2위였던 SK하이닉스가 ‘부동의 1위’ 삼성전자를 제치고 1위 자리에 오른 것이다. 1분기엔 D램 분야, 2분기엔 낸드 플래시를 비롯한 전체 메모리 분야에서 사상 처음으로 매출 1위를 기록하면서 영원할 것 같았던 순위표를 단숨에 고쳐 썼다.1 주역은 단연 고대역폭메모리(HBM)다.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과 함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HBM 시장을 사실상 석권하면서 SK하이닉스는 대역전극을 완성했다. 3분기 들어 전체 메모리 분야에선 삼성전자에 단독 1위(매출 194억 달러)를 내줬지만 D램 시장에선 여전히 1위를 지키며 치열한 ‘왕좌의 게임’에 돌입했다.

2012년 적자의 늪을 헤매던 하이닉스가 SK의 품에 안길 때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수조 원대 투자에도 불구하고 기술력도, 인재도, 투자도, 심지어 조직문화조차도 ‘삼성전자 쫓아가기’에 바쁘다는 평가를 받았던 SK하이닉스다. 성숙기에 접어든 산업, 그것도 투자 기간과 규모의 차이가 고스란히 경쟁력 격차로 이어지는 반도체 분야에서 2위 업체가 한참 앞서가던 1위 업체를 따라잡은 것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은 수준의 ‘초고성과’라 할 수 있다.

SK하이닉스의 파격적인 성과 보상 체계 혁신도 화제가 됐다. 노사 합의를 통해 기본급 1000% 수준으로 묶여 있던 성과공유제(PS)의 상한을 없애고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 재원으로 활용한다. 업계에선 올해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이 약 37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 경우 직원 1인당 1억 원 이상의 성과급을 받을 수 있을 전망이다. 이익을 낸 만큼 구성원들 모두가 더 큰 보상을 가져갈 수 있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보상 체계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만년 2위였던 SK하이닉스는 어떻게 초고성과를 창출할 수 있었을까. 2018년 HBM 개발을 중단한 삼성전자의 오판,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열린 AI 시대 등 다양한 외부 요인이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초고성과를 이끌어낸 원천은 결국 조직 내부에서 이뤄진 다양한 혁신과 노력이었다.

DBR은 2013~2019년 SK하이닉스의 조직문화 혁신을 이끌었던 현순엽 전 SK하이닉스 기업문화센터장(부사장)을 만나 SK하이닉스의 초고성과 창출 비결을 들어봤다. 그는 신뢰에 기반한 협업 문화가 핵심이었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의미의 초고성과는 상위 1% 인재가 아니라 이른바 ‘신뢰게임’2 을 하는 조직의 힘을 통해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 전 부사장은 “개인의 탁월함이 아니라 조직 전체가 상호 신뢰 안에서 협업하고 시너지를 낼 수 있게 해야 한다”며 “경쟁보다는 신뢰 관계 아래서 이뤄지는 자율적인 도전이 이어질 때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AI 시대에도 이 같은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현 전 부사장은 “AI라는 유용한 도구의 도움으로 이제 대부분의 조직 구성원은 본인의 의지와 노력, 역량과 타이밍에 따라 언제든 초고성과자로 올라설 수 있게 됐다”며 “기존에 엄청난 성과를 낸 유능한 인재들을 특별히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가 초고성과자로 올라서든 팀의 일원으로서 조직의 성과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최근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거둔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10년 넘게 달려온 SK하이닉스 모든 구성원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게 돼 개인적으로 큰 보람을 느낀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한 번의 성취로 딱 잘라 이야기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하나의 새로운 기술이 제품으로 출시되려면 연구 단계에서 원천 기술과 기술 플랫폼을 확보하고, 이걸 기초로 양산성을 확보한 후 실제 양산 과정서 수율 극대화와 원가 절감을 이뤄내야 한다. 최소 3~5년이 걸린다. AI 시대를 맞아 HBM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굉장히 길고 험난했다.


어떤 과정이 있었나?

시작은 절박함이었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글로벌 2위 업체였지만 ‘허약한 2위’였다.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나름대로 사업을 키워갔지만 D램이나 낸드 플래시 등 주요 품목에서 어느 것 하나 1위 기업을 이길 수 있는 기술, 제품이 없었다. 자칫 경쟁사가 저가 경쟁에 나설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반전의 실마리가 절실했다. 그때 찾은 게 HBM이었다. 마침 AMD가 HBM 개발을 의뢰했고 부족한 리소스에도 불구하고 한번 해보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렇게 2013년 세계 최초로 HBM을 개발했다.

하지만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HBM 시장이 커지는 속도와 수요 규모는 예단하기 어려웠다. 기술 개발도 난항을 겪었다. 2015년 엔비디아에서 2세대 HBM 개발을 요청했는데 품질 테스트에서 탈락하면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삼성전자가 HBM2 개발에 먼저 성공하면서 이듬해 엔비디아에 제품을 공급했다. 2019년 사내 C레벨 교육과정인 ‘하이닉스-스탠퍼드 퓨처 인사이트 프로그램’을 통해 10여 명의 톱팀(C레벨 부문장) 임원과 함께 엔비디아를 방문했는데 현지 직원이 “약속을 해놓고 어떻게 (HBM2) 개발에 실패할 수 있느냐”며 혼을 냈다. 쇼룸에서도 모든 제품에 경쟁사 반도체만 들어 있다며 “창피하지도 않냐”고 면박을 줬다. 자리에 있던 임원 모두 오늘의 망신을 잊지 말고 HBM2를 반드시 성공시키자고 결의했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개발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이게 될까?’ 하는 의구심도 상당했다. 특히 삼성이 HBM 추가 개발을 중단하면서 회의적인 목소리가 커졌다. 규모도 더 크고 자원도 많은 1등 기업이 그만둔 사업인데 과연 우리가 계속해야 하느냐는 의견들이 나왔다. 하지만 단기적 관점에서 볼 일이 아니었다. 승부수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했고 HBM이 아니라면 마땅한 수가 없기도 했다. 본원적 경쟁력, 즉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경쟁사가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한다는 판단도 섰다. 프로젝트를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그때 포기했다면 지금의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성과를 이끈 특별한 ‘초고성과자’는 없었나?

많은 사람이 엄청난 성과 뒤에 특별한 천재, 성공의 주역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한다. 하지만 당시 CEO였던 박성욱 전 SK하이닉스 부회장3 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두가 ‘N분의 1만큼’ 기여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반도체는 혼자서 잘한다고 되는 산업이 아니다. 기술 하나, 공정 하나를 완벽하게 갖춘다고 해서 엄청난 제품이 나오는 게 아니다. 설계, 공정, 생산, 품질, 영업 등이 다양한 요소가 모두 맞물려 있다. 한 군데만 삐끗해도 전체 일정이 흔들린다. 이런 구조에서 개인 성과는 의미가 크지 않다. 사실 어지간한 대·중견기업들이라면 거의 이렇다. 스타트업 같은 작은 조직이 아니라면 개인에게 기대는 기업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내부적으로 TLE(Top Level Engineer)로 부르는 하이포(하이 포텐셜) 인재들이 있었다. 조직 내 평판이나 부서장 평가 등을 통해 식별한 최정예 인재들이었다. 2016년 삼성과의 기술 역량을 비교 분석한 결과 양적 역량에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을 위해 전체 기술 역량을 견인할 수 있는 기술 임원 150명, TLE 300명을 최정예로 육성하는 전략이 추진됐다.

먼저 유명무실했던 기술 전문 임원 트랙을 정상화해 엔지니어들이 의미 있는 커리어 목표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장기간 육성한 엔지니어들이 팀장이라는 관리직으로 빠지지 않고 현업에서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DE(Distinguished Engineer)라는 커리어 트랙도 마련했다. DE들이 정년퇴직 이후 남을 수 있는 HE(Honored Engineer) 제도도 함께 도입했다. 전문직 커리어 트랙을 관리직 커리어 트랙보다 낮게 평가하는 시각들이 있는데 적어도 SK하이닉스 안에선 아니었다. DE들의 기술 역량은 경영 임원이나 팀장들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고, 오히려 나은 경우도 많다. 다만 조직과 사람을 관리하는 소프트 스킬이 다소 약한 경우나 본인이 자신 있는 기술 분야에 집중하고 싶은 경우를 위해 코스를 나눠 준 것이다. 그래서 DE들의 보상 수준도 관리직 트랙과 전혀 차이를 두지 않았다.

TLE는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 인력풀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먼저 본부장급 이상 리더들이 산하 부문의 TLE 육성을 직접 책임졌다. TLE 후보 리스트를 만들어 개별 면담을 하고, 도전적인 프로젝트 경험을 제공하고, 커리어 고민도 함께해줬다. 기대를 통해 성과를 창출하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노린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번 TLE라고 해서 계속 높은 성과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반대로 성과가 낮았던 사람도 꾸준히 발전해서 TLE 그룹에 들어오기도 한다. 성과는 소속 분야, 쌓인 경험, 개인의 의지, 팀원과의 케미스트리 등에 따라 달라졌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엄청난 ‘초고성과자’는 실무에선 찾기 어려웠다.


팀, 조직 차원의 협업을 강조하는 이유인가?

그렇다. SK하이닉스는 한두 명의 고정적인 ‘스타 플레이어’가 계속해서 성과를 내는 조직이 아니다. 성과는 개인의 천재성보다는 팀의 축적된 실행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누가 제일 잘하는가’보다 ‘어느 팀이 가장 협업이 잘되는가’가 중요한 질문이 된다. 특히 반도체는 기술적 난도가 높아 한 명이 모든 걸 이해하고 해결할 수가 없다. 뛰어난 개인이 많으면 당연히 좋지만 진정한 성과는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이 잘 작동할 때 나온다.

그래서 성과 평가와 보상 차등도 조직의 탐욕과 신뢰를 감안해 부서장이 셀프 디자인(self design)해 소통하도록 자율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팀의 신뢰를 최우선하는 것이 SK하이닉스의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우수한 개인은 중요하지 않은가?

물론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우수함의 기준을 좀 달리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 ‘머리 좋은 천재’보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독종’을 더 높게 평가한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사람도 좋지만 경험상 소위 ‘독종’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뭔가 만들어내는 걸 더 많이 봐왔다. 어떤 일을 해보고 또 해보고, 실패해도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도하는 강인한 의지와 실행력을 가진 이들이다.

SK하이닉스 내에선 혁신을 두고 ‘엔지니어 손맛’이라는 표현을 썼다. 현장에서 수없이 시도하고, 자신의 손으로 일을 직접 다루며 감각을 얻고, 그 끝에 혁신이라는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엔지니어 손맛을 발휘하려면 조직과 리더가 지원해줘야 한다. 독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고 나섰을 때 팀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힘을 실어줘야 한다.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환경하에서 비로소 손맛이 나온다. SK에선 자발적·의욕적 두뇌 활용, ‘VWBE(Voluntary/Willing Brain Engagement)’라는 용어로 요약한다. 자발적이고 의욕적일 때 두뇌 활용은 극대화되고 이때 개인의 행복과 성과가 최대화한다는 철학을 담고 있다. SK의 모든 경영 시스템이 VWBE를 자극하는 환경 조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게 하나의 문화가 되면 천재 몇 명이 아니라 수많은 엔지니어의 손끝에서 끊임없이 혁신이 나오는 구조가 완성된다. 재직 시절 ‘SKMS 실천상’이라는 이름의 월간 혁신사례 공모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미 있는 혁신이 매달 나올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3~4년 동안 매달 10건 이상의 혁신 사례가 꾸준히 들어왔다. 그 사례들을 다 모아서 분석해 보니 흥미로운 패턴이 있었다. ‘벤치마킹 드리븐’ ‘멀티펑션(크로스펑션) 드리븐’ ‘집단지성 드리븐’ ‘독종 아웃라이어 드리븐’이다. 혁신은 언제나 네 가지 중 하나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4 이 중 독종 아웃라이어 드리븐을 제외한 나머지 패턴은 혼자 떠올린 아이디어가 아니라 협력업체·경쟁사·연구소·해외 연수 등에서 온 새로운 관점을 서로 주고받으며 발전한 결과였다. 혁신을 일으킨 사람들은 천재가 아니었다. 평범하지만 호기심이 많고 남의 말을 새로운 신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다. 똑똑한 사람보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사람이 훨씬 혁신적이었다.

AI 시대에도 이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AI가 지식과 정보 처리량을 폭발적으로 늘려 개인의 역량을 키워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역량을 ‘실제 성과’로 바꾸는 건 여전히 팀이다. AI를 아무리 잘 활용하는 인재라 하더라도 협업과 실행이 없다면 성과로 전환되지 않는다. AI가 천재를 만들어 줄 수는 있어도 압도적인 성과는 결국 인간, 그리고 조직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협업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도 중요했을 텐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만으론 협업을 완벽한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한다. 많은 기업이 공통 KPI를 설정하고, R&R에 협업 프로세스를 명시하고, 소통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열을 올린다. 협업을 촉진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KPI와 R&R이 협업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복잡하고 디테일한 프로세스를 KPI나 R&R에 세세하게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계선에선 새로운 논쟁이 생기고 이걸 처리하느라 에너지와 시간은 또다시 낭비된다. 특히나 R&R은 본질적으로 협업이 아니라 분업을 위한 것이다. 협업이라는 모호한 영역에서 나나 내가 속한 팀이 할 업무만 정확히 선을 긋겠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책임 면피 시스템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진정한 협업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단단할 때 가능하다. SK하이닉스가 특히 주안점을 둔 것은 건설적 대립이었다. 적당한 타협, 무조건적인 배려나 양보가 아니라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방향성이다. 건설적 대립이 가능하려면 심리적 안전감, 즉 신뢰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신뢰 없는 건설적 피드백은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신뢰를 기반으로 건설적 피드백을 피하지 않는 협업 마인드가 하나의 문화처럼 조직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


조직 내 신뢰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나?

‘신뢰’라는 말을 처음부터 내세운 건 아니다. 처음엔 ‘협업이 잘 안 된다’는 문제의식만 있었다. 일례로 2014년 하이포 팀장들과 CEO 간담회가 있었는데 이때 우리 회사의 문제가 무엇이냐는 박 전 부회장의 질문에 전원이 ‘협업이 안 되는 것’을 꼽았다. 물론 태생적인 이유가 있었다. 1999년 정부 주도로 현대반도체와 LG반도체를 합쳐서 만든 회사를 2012년 SK가 인수한 까닭에 각 기업의 DNA가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벽을 깨지 않고선 원활한 협업이 불가능했다.

우리는 톱팀 운영 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바꿨다. 과거에는 ‘부문장 위클리’라고 해서 각 부문장이 자기 일만 보고하고 끝내는 회의를 가졌다. 그러다 보니 자기 보고 내용만 챙길 뿐 남의 일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주간 보고는 서면으로 대체하고 회의에선 오직 전사 관점의 어젠다만 다루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차 부문장들이 ‘전사적 리더’ 관점에서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때를 돌이켜 보면 마치 10명의 CEO가 의견을 나누는 회의 같았다. 각 부문장이 자기 일뿐 아니라 회사 전체 성과를 책임지는 ‘어카운터빌리티(accountability)’를 갖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양산 친화적 기술’이라는 연구개발 미션이다. 과거엔 ‘세계 최고의 기술 개발’이 목표였다. 그런데 연구실 안에서만 최고인 기술을 개발하면 다음 제조, 양산 단계에서 성과가 확 떨어졌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양산 단계에서도 효과적으로 적용될 기술을 목표로 삼고 연구하도록 만들었다. 연구소 따로, 공장 따로가 아니라 양산성과 수율이라는 목표하에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톱팀에서 이런 문화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전사적인 ‘신뢰 구조’가 만들어진다. 리더들이 서로 믿고 도와주는 모습을 보여주면 하부 조직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 SK하이닉스의 신뢰는 이렇게 톱팀에서 캐스케이딩(Cascading)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SK 특유의 스피크업 문화를 담은 ‘원온원’이다. 미국에선 원온원을 안 하는 회사가 없을 정도지만 한국에선 아직도 이 제도를 부담스러워하는 곳이 많다. SK하이닉스는 ‘CEO→부문장→팀장→팀원’으로 이어지는 1대1 원온원 대화를 전사적으로 제도화했다. 특정 업무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리더가 30분 내내 다양한 사안을 두고 팀원의 기탄없는 의견을 듣는 소통에 방점을 찍었다. 경영진부터 시작하니까 자연히 원온원 문화도 아래로 확산했다. 서로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신뢰는 더 단단해졌다.

실패를 단기적으로 재단하지 않는 문화도 중요했다. SK하이닉스 안에선 일희일비성 신상필벌이 없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단기적 실패가 장기적 관점에선 성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개발하려던 A라는 D램 기술 개발 프로젝트가 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실패였다. 극도의 시간 싸움으로 이뤄지는 기술 미세화 프로젝트였는데 일정 지연이 발생해 실패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과정서 쌓인 노하우와 핵심 기술은 다음 세대 기술을 빠르게 만들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실패한 프로젝트가 다음 프로젝트의 성공을 만든 셈이다.


최근 SK하이닉스의 막대한 성과 보상이 화제가 됐다.

성과보상제도는 신뢰 관계 구축의 핵심이다. SK그룹의 경영철학 속에 ‘PS(Profit Sharing)’는 오랫동안 자리 잡은 원칙이다. “자본가만 돈 버는 세상은 안 된다. 근로자도 자본을 축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의 철학이 핵심으로 SKMS(SK의 경영철학체계)에 오래전부터 반영돼왔다. SK하이닉스도 이 원칙을 그대로 가져와서 제도로 구체화했다.

초기에는 경제적 부가가치(EVA, Evonomic Value Added)를 기준으로 보상을 계산했다. 영업이익에서 자본비용을 뺀 나머지를 성과로 보고 나누는 방식이다. 사실 이론적으로는 이것이 가장 정확하다. 하지만 계산이 복잡하고 구성원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구성원 입장에선 우리가 일군 성과가 확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이걸 영업이익의 10%로 단순화했다. 이익을 창출하면 함께 나눈다는 메시지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상한이 사라진 것을 두고 엄청난 변화로 여기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SK하이닉스는 물론 SK그룹 전반엔 항상 ‘덜 주자’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주자’는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각 계열사 CEO도 여유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구성원에게 돌아가는 몫을 만들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기부여 이전에 성과에 걸맞은 보상이 신뢰의 가장 기초적인 밑거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PS 상한이 이슈가 된 건 그동안 이렇게 큰 영업이익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성과 앞에서 제도를 재정비한 것일 뿐 성과 보상에 대한 회사와 경영진의 철학은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리더십 측면에서 초고성과를 이끌어낸 비결을 꼽는다면 무엇이 있을까?

리더십을 핵심 성과와 정렬한 것이다. 반도체 분야의 핵심은 결국 기술이다. 2013년 SK하이닉스 대표가 된 박 전 부회장은 SK 출신이 아니라 하이닉스 엔지니어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누구보다 기술을 잘 아는 사령탑이 키를 잡으면서 많은 의사결정이 기술적 합리성하에 이뤄지기 시작했다. 기술 회사에서 기술적 배경이 약한 CEO가 취임하면 각 조직들이 힘이 세지고 서로 경쟁하게 된다. 기술이라는 본질보다는 CEO가 이해하기 쉬운 논리, 잘 포장된 단어로 자기 조직에 유리한 결정을 이끌어내려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을 잘 아는 CEO 앞에선 다르다. 정치적 목적으로 기술의 본질에 어긋나는 보고를 하면 CEO에게 그대로 간파당한다. 톱팁의 회의 이슈가 ‘본원적 경쟁력’을 중심으로 이뤄질 수 있었던 것도 CEO가 직접 기술 경쟁력 이슈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유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리더십의 연속성을 유지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CEO가 자주 바뀌면 조직의 방향성이 흔들린다. 보통 국내 대기업 CEO의 보임 기간은 3~4년이다. 하지만 박 전 부회장은 6년이라는 오랜 시간 재임하며 조직의 기틀을 닦았다. 경영진을 교체하는 과정도 장기적인 승계(succession) 과정을 거쳤고, 실제로 많은 전략·문화는 CEO와 후계 준비자 간에 코디벨롭(co-develop)된 것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교체가 아니라 함께 일하면서 인수인계를 자연스럽게 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종전의 기틀 위에서 후임이 지속적으로 성과를 올리고 전임자의 노력과 성과를 상호 존중하는 문화도 형성됐다.


HR의 탈중앙화와 자율화도 특별한 시도인데?

탈중앙화로 요약되는 현장 중심 HR 시스템 ‘비즈 HR’은 SK하이닉스의 중요한 성과 창출 레버 중 하나였다. SK하이닉스는 부문장들에게 산하 조직의 HR 정책을 스스로 디자인하도록 권한을 위임하고 부문장 직속 HR팀까지 편제한다. 부문장들이 직접 HR을 통해 산하 조직의 역량과 동기를 끌어올릴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많은 기업에서 HR 권한은 CEO에게 집중된다. CEO 산하 HR 조직이 현업 부서를 관리하고 통제한다. 회사는 부문장들에게 산하 조직의 경쟁력을 강화하라고 요구하지만 정작 경쟁력 강화를 유도할 핵심 수단인 HR 권한은 중앙에 집중시켜 놓는다. 칼은 주지 않고 채소를 잘라놓으라고 요구하는 격이다.

HR 권한을 갖게 된 SK하이닉스 부문장·본부장들은 성과 창출을 위해 역량과 동기라는 변수를 적극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조직과 인력의 변경, 외부 역량의 수혈, 자체 포상, 역량 육성 프로그램 운영, 일하는 문화 혁신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연구소를 이끌던 한 임원이 미국의 글로벌 반도체에 근무하던 한국 출신 톱 엔지니어들을 하나하나 개별 접촉해 대규모로 영입한 경우도 있었다. 현장 리더가 필요한 인재를 직접 발로 뛰면서 영입한 사례였다.


AI 시대, 초고성과 창출과 핵심 인재 관리의 핵심 전략은 무엇이 될까?

먼저 AI와 사람의 관계를 재정의해야 한다. AI는 인간의 능력을 보완하는 동료이지 대체자가 아니다. AI로 끌어올린 효율과 속도를 어떻게 성과로 연결할지는 결국 사람의 손에 달렸다.

성과 창출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 AI로 증폭된 개인의 역량을 팀의 성과로 전환하려면 조직 내 신뢰 구조를 강화해야 한다. 허심탄회한 스피크업 문화와 원온원 등의 도구를 통해 심리적 안전감하에서 누구든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자율성을 끌어올리고 실패를 허용하는 문화 역시 중요할 것이다.

핵심 인재 관리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유능한 직원을 키우는 것은 중요한 미션이지만 과거처럼 ‘똑똑한 사람 몇 명’을 집중 관리하는 접근 방식은 한계가 있다. AI 시대의 초고성과는 한두 명의 천재가 아니라 수백 명의 호기심형·협업형·실행형 인재가 함께 만들어내는 집단적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현장 리더가 직접 인재를 발굴·육성·보상하는 SK하이닉스식의 탈중앙화 HR이 좋은 방법일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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