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
AI가 범용 도구나 기능 특화 도구를 넘어 ‘버티컬 AI’로 진화하면서 게임, 패션 등 창작 산업의 파이프라인을 재편하고 있다. 버티컬 AI는 산업별 업무 흐름과 품질 기준을 학습해 의사결정과 실행까지 직접 연결한다. 그리고 기획–제작–유통–마케팅으로 이어지는 전체 워크플로를 통합해 기업의 운영 구조와 의사결정 방식까지 바꾸는 기반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이런 전환은 창작자의 역할을 ‘제작자’에서 ‘디렉터’로 확장시키며 생산성과 고유성 사이의 긴장을 심화시킨다. AI는 반복 작업을 대체해 실험의 속도를 높이고 범위를 넓히지만 데이터 기반 추천은 주류 패턴을 강화해 다양성과 주변부의 미학을 약화시킬 위험도 있다. 따라서 버티컬 AI는 창의적 판단을 대체하기보다 인간의 미적 직관과 전략적 사고를 보조하는 인프라로 자리매김해야 하며 기업 역시 AI를 사업 모델과 생태계를 재정의하는 핵심 자산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AI가 범용 도구에서 산업별 특화 솔루션으로 진화하면서 창작 산업 전반에 걸쳐 업무 흐름과 의사결정에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AI가 창작 파이프라인(Pipeline, 기획·제작·유통 등 일련의 단계별 흐름)을 어떻게 재편하는가다. 최근 AI 산업을 둘러싼 논의에서는 ‘버티컬 AI(Vertical AI)’라는 개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는 특정 분야·타깃 고객 수요에 특화된 AI 기술 및 서비스를 총칭하는 것으로 여러 주제에 폭넓게 대응하는 범용 AI와 달리 한 분야를 깊이 이해하도록 만들어졌다. 산업별 전문 용어, 워크플로, 품질 기준을 학습해 실무 현장에서 즉시 활용 가능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특히 최근 게임, 패션, 미디어 분야에서의 버티컬 AI는 단순한 생산성 향상 도구를 넘어 창작 파이프라인 자체를 재편하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버티컬 AI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AI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술을 넘어 특정 산업에서 실제로 일을 바꾸는 도구로 재정의되고 있다. 이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AI를 하나의 덩어리로 보지 말고 역할과 범위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 산업 현장에서 의미 있게 작동하는 구분은 범용 AI(General-purpose AI), 기능 특화 AI(Function-specialized AI), 버티컬 AI(Vertical AI)라는 세 가지 층위다. 이 구분은 기술의 성능 차이를 나누기보다는 AI가 실제 업무에서 어디까지 책임지는지를 기준으로 한 프레임이다.
범용 AI는 하나의 모델이 다양한 인지적 작업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AI다. 텍스트 생성, 요약, 번역, 추론, 기획, 코딩까지 폭넓은 업무를 가리지 않는다. 챗GPT(ChatGPT), 클로드(Claude), 제미나이(Gemini)와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이 여기에 해당한다. 범용 AI는 유연성과 확장성이 강점이다. 다만 특정 산업의 전문 용어나 품질 기준, 실제 업무 프로세스를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도록 설계된 것은 아니다. 범용 AI는 ‘무엇이든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계에 가깝다.
그다음 층위가 기능 특화 AI다. 이는 기업의 업무 효율화 도구로 주로 쓰인다. 미드저니(Midjourney)와 스테이블디퓨전(Stable Diffusion)은 엄밀히 말하면 이미지 생성이라는 단일 기능에 고도로 특화된 생성형 AI다. 음성 합성에 특화된 일레븐랩스(ElevenLabs), 영상 편집과 생성에 초점을 둔 런웨이(Runway)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다. 이들은 특정 기능에서는 매우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결과물이 어떤 산업에서 어떤 맥락으로 사용되는지까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AI로 만든 이미지나 영상은 어느 정도 훌륭한데 이걸 실제 업무에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생성형 AI의 초기 물결이 실무 현장에서 한계를 드러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AI의 성능이 아니라 기능 중심 설계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패션 디자이너가 스트리트 캐주얼 룩을 요청하면 기능 특화 이미지 생성 AI는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으나 원단 물성, 생산 공정 제약,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모두 반영한 결과물을 보장하지 못한다. 게임 개발자가 AI에 3D 캐릭터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더라도 그 결과물은 곧바로 게임에 넣어 쓸 수 있는 완성품이라기보다는 이후 수정과 보완이 필요한 초안 수준의 결과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지점에서 버티컬 AI의 필요성이 분명해진다. 버티컬 AI는 특정 산업과 업무 분야에 특화된 AI 모델로 산업별 데이터 구조, 전문 용어, 업무 흐름, 품질 기준을 함께 학습한다. 그래서 단순히 잘 만든 결과물이 아니라 바로 의사결정과 실행에 투입할 수 있는 산출물을 만들어낸다. 이 지점에서 AI는 단순한 창작 보조 도구를 넘어 트렌드를 예측하고, 재고와 생산량을 조율하며, 고객에게 맞춤형으로 상품과 콘텐츠를 전달하는 등 기업의 의사결정과 운영 전반을 떠받치는 기반 시스템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이 프레임으로 보면 기업들이 지금 버티컬 AI에 투자하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범용 AI는 탐색과 실험에는 유용하지만 핵심 업무를 맡기기에는 결과의 예측 가능성이 낮다. 기능 특화 AI는 업무 효율 향상에는 도움을 주지만 업무의 전체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반면 버티컬 AI는 특정 산업의 가장 큰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며 시간과 비용, 의사결정 구조까지 한 번에 바꾼다. 따라서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기업 운영 체계를 다시 설계하는 수준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콘텐츠·미디어를 비롯한 창작 산업에서 지금까지 AI는 이미지 생성, 음성 합성, 영상 편집처럼 개별 기능 단위에서 활용됐다. 그러나 이런 산업은 기획, 제작, 편집, 유통, 마케팅으로 이어지는 복합적인 워크플로를 가진 영역이다. 전체 흐름을 전제로 하지 않는 AI는 생산성을 부분적으로 높일 수는 있어도 산업의 작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이런 지점에서 버티컬 AI를 도입하면 AI의 역할은 단순한 콘텐츠 생성을 뛰어넘게 된다. 기획 단계에서는 플랫폼별 시청 데이터와 시장 반응을 분석해 포맷과 길이를 제안하고 제작 단계에서는 일정과 예산을 고려한 현실적인 선택지를 제공한다. 유통 이후에는 마케팅용 파생 콘텐츠 제작과 글로벌 로컬라이징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한다. 이처럼 AI가 개별 작업을 돕는 도구를 넘어 콘텐츠 산업 전체의 의사결정 구조를 관통하는 기반 기술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이제 AI 경쟁의 다음 국면은 모델의 크기나 범용성이 아니라 산업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버티컬 AI 도입이 촉진하는 파이프라인의 재편
1. 게임
K컬처 300조 원 시대를 이끌 핵심 동력으로 게임 산업이 주목받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K콘텐츠의 총수출액은 54억5969만 달러(약 8조55억 원)로 집계됐는데 이중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세인 K팝이나 영화 등과 비교해 봤을 때도 월등히 높은 31억6971만 달러(약 4조6477억 원)에 육박한다. 정부 역시 향후 문화예술의 축을 이끌어 갈 산업으로 게임을 점 찍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AI는 국내외 게임 업계에 지각변동과 같은 변화의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다. AI로 게임 캐릭터를 생성하고 사용자와 상호작용하는 콘텐츠를 개발하며 시나리오와 세계관을 구상하는 등 활용 방안도 전방위적이다. 크래프톤, 넷마블, 넥슨, 엔씨소프트(이하 엔씨) 등 국내 대표 게임 개발사는 경쟁하듯 공격적으로 AI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엔씨는 14년 동안 AI 연구와 투자에 집중해 온 이력을 바탕으로 2025년 2월 AI 전문 자회사 ‘NC AI’를 독립 법인으로 분사하며 AI 사업의 다변화를 추진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엔씨는 버티컬 AI를 구축하면서 기존 게임 기업이라는 정체성을 넘어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도약하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엔씨의 AI 전략은 크게 ‘게임 제작 자동화 → 미디어 제작 자동화 → 버티컬 AI 사업 확장’이라는 3단 구조로 전개되고 있다.
리니지, 블레이드 앤 소울 같은 게임을 만들며 성장한 엔씨의 강점은 여러 사람이 같은 온라인 세계에서 동시에 접속해 캐릭터를 키우고 스토리의 흐름을 따라가며 모험을 즐길 수 있는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이다. 엔씨는 최근 AI 대중화를 계기로 ‘모든 사람은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다(Everyone can be a Creator)’는 미션을 세웠다. 유저가 수동적으로 게임 콘텐츠를 즐기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전달한 것이다. NC AI는 전 세계 사용자들이 더욱 쉽게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통해 디지털 콘텐츠 산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는데 그 기술력의 핵심은 자체 개발한 대규모 언어 모델 ‘바르코 LLM(VARCO LLM)’에 있다. 바르코는 ‘Via AI, Realize your Creativity and Originality’의 줄임말이다. 즉 ‘AI를 통해 창의성과 개성을 실현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24년 9월 공개된 바르코 모델은 한국어 성능을 비약적으로 개선해 추론·수학·글쓰기·코딩·문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성능을 보인다. 이 언어 모델은 한국어는 물론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다국어 처리가 가능하게 설계됐고 자연어처리 작업인 대화, 텍스트 생성, 번역, 요약, 정보 추출, 챗봇 등에 활용 가능하다.
특히 NC AI는 엔씨의 MMORPG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게임 제작의 모든 과정을 AI로 혁신하는 ‘게임 AI(Game AI)’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AI 기반 대화 시스템을 갖춘 AI NPC(Non-Player Character, 비플레이어 캐릭터) 대화 시스템은 기존처럼 미리 짜인 대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의 말에 맞춰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상황에 어울리는 새로운 대사를 생성할 가능성을 열어 뒀다. 이러한 AI 기술은 게임의 설정이나 캐릭터 정보, 세계관을 바탕으로 스토리 요소를 만드는 데 보조 역할을 할 수 있다.
2. 패션
AI는 패션 산업에서 의류 피팅 시뮬레이션, 패션 상품 디자인·룩북 생성, AI 기반 착장 이미지 합성, 사이즈 추천 등에서 활용되고 있다. 무엇보다 버티컬 AI가 패션 산업의 분절된 워크플로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디자이너가 스케치를 그리면, 패턴 제작자가 2D 도면을 만들고, 샘플 제작팀이 시제품을 생산하고, 마케팅팀이 촬영을 진행했다. 각 단계는 최소 수 주가 소요됐고 피드백 반영은 다시 전체 사이클을 반복해야 했다. 패션 특화 AI는 기획, 디자인, 마케팅으로 연결되는 이 흐름을 통합한다. 디자이너가 자연어로 스트리트 캐주얼을 입력하면 수 초 내에 10종 이상의 디자인 시안이 생성되고 원단 변경과 소재 표현, 2D에서 3D로의 변환, 가상 모델 피팅, 배경 합성까지 연속적으로 처리된다. 이는 단순한 속도 향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디자이너가 물리적 샘플 없이도 수십 개의 변형을 실시간으로 비교할 수 있게 되면 창작의 초점이 ‘제작 실행’에서 ‘방향 결정’으로 이동한다.
창작자의 역할이 ‘직접 만드는 사람’에서 ‘무엇을 만들지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패션 디자이너는 여전히 필요하지만 AI를 활용해 하루에 100개의 시안을 검토하는 디자이너와 손으로 하나씩 그리는 디자이너의 생산성 격차는 벌어질 것이다.
2022년에 설립된 미국의 AI 스타트업 라즈베리 AI(Raspberry AI)는 단순히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는 기술 기업이 아니다. 이 회사는 디자이너가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상상을 실제 제품에 가까운 형태로 즉각 구현해 주는 플랫폼을 통해 패션 산업의 오랜 구조적 비효율에 도전하고 있다. 라즈베리 AI는 패션 산업의 언어, 디자인 관행, 제품 개발 흐름을 전제로 설계된 플랫폼으로 실제 제품 개발과 마케팅에 바로 투입 가능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라즈베리 AI의 설립자이자 CEO인 셰릴 리우는 리테일과 테크 산업에서 오랫동안 데이터와 제품 전략을 다뤄온 인물이다. 그의 팀이 처음 던진 질문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본질적이었다. “왜 디자이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도 그 결과를 확인하는 데 몇 주씩 기다려야 할까”였던 것이다. 기존 패션 산업에서는 아이디어 하나를 구체화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 스케치를 바탕으로 샘플을 제작하고 공장에 생산을 의뢰한 뒤 결과물을 다시 받아보는 일련의 과정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단순히 느릴 뿐 아니라 수정과 실험의 반복을 어렵게 만들었다. 라즈베리 AI는 바로 이 지점을 과감하게 뒤집는다. 간단한 스케치 한 장 혹은 이런 분위기의 재킷과 같은 짧은 텍스트 설명만 입력해도 AI가 수 초 만에 고해상도의 제품 이미지를 생성한다. 결과물은 콘셉트 이미지가 아니라 원단의 질감, 봉제 디테일, 실루엣까지 고려한 실제 제품에 가까운 시각화다. 디자이너는 색상과 소재를 바꾸고 스타일을 변주하며 말 그대로 생각하는 속도로 디자인을 실험할 수 있다. 이때 AI는 디자이너를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사고 반경을 확장하는 협업 파트너다. 2025년 말 라즈베리 AI는 글로벌 3D 의류 설계 솔루션의 대표 주자인 브로즈웨어(Browzwear)와 통합을 발표했다. AI로 만든 콘셉트 이미지는 아이디어 단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실제 옷을 만드는 과정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는 브로즈웨어에서 이미 작업하고 있던 3D 의상, 무드보드, 기존 디자인 자산을 그대로 라즈베리 AI로 불러온다. 이를 레퍼런스로 삼아 AI에 새로운 디자인 방향을 요청하면 AI는 콘셉트 이미지와 아이디어를 생성한다. 생성된 결과물은 다시 브로즈웨어로 전달되며 색상 조합이나 실루엣 방향, 3D 의상 개발을 위한 참고 자료로 즉시 활용 가능한 상태로 전환된다. 이 지점이 핵심이다.
생성형 AI는 더 이상 아이디어 단계에서만 쓰이는 도구가 아니다. 과거에는 아이디어를 스케치한 뒤 이미지를 저장하고 다른 툴로 옮겨 3D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의 사고 흐름은 쉽게 끊기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디어, 시각화, 3D 구현, 제품 개발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디자이너는 상상의 여정을 멈추지 않은 채 AI가 만든 결과를 즉각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라즈베리 AI는 언더아머, MCM 등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과 협업하며 실험적 기술이 아닌 현업 디자이너가 매일 사용하는 실무 도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NC AI의 바르코 아트패션(VARCO Art Fashion) 역시 패션 디자이너와 마케터를 위한 AI 이미지 생성 도구로 패딩 점퍼, 다운 점퍼 등 업계 전문 용어와 트렌드를 학습한 ‘패션 전용 베이스 모델’을 기반으로 한다. AI를 통해 제품 디자인 시안부터 모델 착장 컷, SNS 마케팅용 비주얼까지 다양한 패션 콘텐츠를 손쉽게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실제로 디자이너가 스트리트 캐주얼처럼 자연어 프롬프트인 키워드만 입력하면 약 3.2초 만에 10종 이상의 의류 디자인 시안을 자동으로 생성한다. 또한 브랜드 맞춤형 가상 모델 피팅과 배경 합성까지 가능해 시제품 제작 없이도 미리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이 기술을 도입하는 브랜드도 늘고 있는데 MLB, 디스커버리 익스페디션으로 잘 알려진 패션 기업 F&F는 바르코 아트를 도입해 신상품 기획부터 디자인, 생산까지의 전체 주기를 무려 절반으로 단축하는 데 성공했다.
AI는 패션 트렌드 예측의 방식 자체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전통적으로 패션 트렌드 예측은 패션위크, 거리 패션, 매거진, 트렌드 리포트 등 전문가의 관찰과 해석에 기반한 정성적 방법에 의존해 왔다. 이러한 방식은 패션 산업의 감각적 특성과 잘 맞아떨어졌지만 변화 속도가 빨라지고 글로벌 시장이 복잡해지면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와 달리 뉴욕 기반의 트렌달리틱스(Trendalytics)는 AI 트렌드 예측 및 소매 시장 분석 플랫폼으로 패션, 뷰티,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들이 직관 대신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기업은 방대한 디지털 데이터를 분석해 트렌드의 확산과 소멸 과정을 정량적으로 파악한다. 이 플랫폼은 소셜미디어 이미지와 언급량, 검색 데이터, 이커머스 및 리테일 활동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특정 스타일, 아이템, 컬러, 소재가 어느 시점에서 성장 국면에 진입했는지 혹은 이미 정점을 지나 하락 국면에 접어들었는지를 수치와 지표로 보여준다.
특히 트렌달리틱스는 지금 유행하는가라는 직관적 질문을 넘어 트렌드의 성장 속도, 시장 내 침투 범위, 소비자 반응의 지속가능성 등을 분석함으로써 트렌드를 하나의 수명주기(lifecycle)로 해석한다. 이를 통해 브랜드와 리테일러는 시즌 기획, 상품 구성, 머천다이징, 마케팅 타이밍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감각과 경험에 의존하던 트렌드 판단이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즉 트렌달리틱스는 패션 산업에 특화된 데이터 구조와 의사결정 맥락을 AI 시스템에 내장함으로써 인간의 안목을 대체하기보다는 확장하고 보조하는 방식으로 트렌드 예측의 패러다임을 재편하고 있다.
그러나 AI 기반 트렌드 예측의 확산이 곧바로 패션 산업의 이상적인 미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트렌드를 데이터로 정량화하고 수명주기로 분석하는 방식은 의사결정의 정확성을 높이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패션의 다양성과 실험성을 약화할 위험도 내포한다. 다수의 브랜드가 유사한 데이터 신호와 알고리즘적 판단에 의존할수록 시장에는 비슷한 디자인과 아이템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질 가능성이 커진다.
특히 AI가 성공 확률이 높은 선택지를 반복적으로 추천하는 구조에서는 아직 데이터로 포착되지 않은 미세한 변화나 소수 집단의 감각, 즉 새로운 미학의 징후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기 쉽다. 패션 역사에서 많은 혁신은 언제나 주류가 아닌 주변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취향과 실험에서 출발해 왔다. 이 지점에서 AI는 창의적 판단의 대체자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 시장 논리를 강화하는 보수적 장치로 작동할 위험을 안고 있다.
따라서 패션 산업에서 버티컬 AI의 역할은 트렌드를 결정하는 존재라기보다 인간의 미적 판단과 전략적 상상력을 보조하는 도구로 재정의돼야 한다. 데이터가 알려주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패턴이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적 전환점 자체는 아니다. 결국 최종적인 선택의 책임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으며 AI는 그 판단을 정교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인프라에 가깝다. 패션 산업의 경쟁력은 AI가 제공하는 예측의 정확성과 인간이 감지하는 미적 직관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형성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결코 패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콘텐츠, 영화, 게임을 포함한 거의 모든 창작 산업에서 유사한 흐름이 관찰된다. AI는 창작의 주인공이 아니라 창작이 흘러가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조력자로 자리 잡고 있다.
버티컬 AI가 창작 산업에 던지는 세 가지 질문
1. 창작자 역할의 변화, 제작자에서 디렉터로
버티컬 AI가 창작 파이프라인에 개입하면서 일부 직업은 사라지거나 크게 변화할 것이다. 이는 일자리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역할의 재정의와 변화를 의미한다. 아티스트들은 AI가 반복적이고 시간 소모적인 작업을 대신하면서 더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부분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면에서 버티컬 AI는 창작자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아이디어를 실제 형태로 구현하는 데 걸리는 시간, 실패와 수정이 허용되는 범위, 반복 실험의 비용 구조는 달라진다. 그 결과 더 많은 시도와 실험이 가능해지고, 더 빠른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AI가 바꾸고 있는 것은 창작의 속도와 밀도다. 창작자는 AI로 수십 개의 변형을 빠르게 생성하고 테스트할 수 있어 실험 범위가 넓어지고 생각을 실제 형태로 구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더 많은 시도를 더 짧은 시간 안에 반복할 수 있다.
누구나 비슷한 품질의 결과물을 빠르게 생성할 수 있게 되면 대체적인 창작의 진입장벽이 낮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창작자의 차별화와 고급화를 만들어 내는가. AI 활용 능력은 기본이고 기술적 실행 능력뿐 아니라 미적 판단력, 전략적 사고, ‘무엇이 좋은 창작물인가’를 평가하는 안목의 중요성이 커질 것이다.
이처럼 AI가 제작에 가담하면서 창작자의 역할은 제작자(Maker)에서 디렉터(Director)로 확장된다. 기존 워크플로에서 어떠한 지점에 AI를 활용해 효율성을 높이며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이와 동시에 AI로 대체하기에 한계가 있는 업무가 무엇이며, 그 역할을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고 수행해 전체 결과물의 완성도를 높일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이제 패션 디자이너는 직접 스케치를 그리는 대신 AI가 생성한 수십 개의 시안 중에서 브랜드 정체성에 맞는 것을 선택하는 데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3D 아티스트는 폴리곤을 하나하나 조정하는 대신 AI가 생성한 모델의 전체적인 방향성과 스타일을 판단하고, 게임 개발자는 NPC의 모든 대화를 설계하는 대신 캐릭터의 성격과 목표를 설정하고 AI와 플레이어와의 상호작용을 디자인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시대엔 기술 자체를 적용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창작자와 AI 캐릭터의 상호작용을 관찰해 최상의 경험을 디자인할 수 있을지가 핵심이다.
2. 고유성과 생산성의 긴장
현재 게임 산업은 콘텐츠 분야에 머물지 않고 예술과 창의성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건희 NC AI 비주얼콘텐츠서비스실 생성형 AI 연구 엔지니어는 “AI 예술이 넓은 의미에서 예술 활동의 한 범주로 편입된 것은 맞지만 예술 도구로서의 정당화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며 “프롬프트 엔지니어링(Prompt Engineering), 컨트롤넷(ControlNet), 로라(LoRA) 등 다양한 의도 반영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지만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적 디테일과 비언어적 뉘앙스를 구현하는 데에는 아직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AI 예술과 AI 콘텐츠 산업은 구별돼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AI 콘텐츠 산업은 예술과 달리 ‘고유성(Originality)’보다 ‘생산성(Productivity)’이 중요한 영역이다. 기업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콘텐츠 생산 자동화로서 AX를 추진하는 것도 이러한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한 전략적 움직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AI는 데이터 기반 학습 구조를 갖기 때문에 데이터가 풍부할수록 콘텐츠 생산 속도는 더욱 빨라지며 반대로 데이터가 부족할수록 생산성이 떨어지는 구조적 특성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일반적 유형의 콘텐츠는 더욱 빠르게 공급되고 새로운 유형의 콘텐츠는 상대적으로 느리게 등장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생성형 AI 기술은 콘텐츠 생산의 ‘가속화 장치’다. 기술 구조에 큰 변화가 없는 한 미래에는 데이터가 풍부하게 존재하는 분야의 콘텐츠가 먼저 공급되는 방향으로 AI 콘텐츠 사이클이 빨라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AI는 창작 산업에서 가속화 장치로 작동하는 동시에 데이터가 풍부한 분야 중심으로 콘텐츠를 과다 생산할 수 있다. 일반적인 스타일의 패션 디자인, 전형적인 게임 캐릭터, 공식화된 영상의 생성은 더욱 속도를 내지만 새로운 유형의 창작은 더딜 수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차별화를 만들 수 있는 인간 창작자의 개입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3. 산업 구조의 재편과 기업의 경쟁력
버티컬 AI는 산업 간 경계를 허물고 있다. 게임 회사가 개발한 3D 기술은 패션 가상 피팅에, 영상 립싱크 기술은 게임 NPC 대화에, 음성 합성 기술은 드라마 더빙과 게임 내러티브에 동시에 활용된다. 이는 새로운 경쟁 구도를 만든다. 과거에는 패션 브랜드끼리, 게임 회사끼리 경쟁했다. 이제는 AI 파이프라인을 보유한 기술 기업이 여러 산업에 동시에 진출하면서 산업별 경계를 뛰어넘어 AI 역량이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따라서 AI를 단일 제품이나 기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산업과 고객을 연결하는 인프라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업이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의 AI가 어떤 다른 산업에 적용될 수 있는가?”와 “우리의 플랫폼이 어떤 생태계를 만들 수 있는가?”다.
AI 도입을 그저 ‘기술 업그레이드’로 접근하는 기업과 ‘사업 모델의 재정의’로 바라보는 기업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전자는 기존 워크플로에 AI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점진적 효율화를 추구한다. 후자는 AI를 중심으로 전체 파이프라인을 재설계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다. 물론 양쪽 다 의미가 있다. AI를 무조건 도입한다고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워크플로에 AI를 추가하든 전체 파이프라인을 재설계하든 그 선택은 오롯이 기업의 몫이다. 버티컬 AI가 열어가는 창작 산업의 구조적 전환은 이미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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