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경쟁 상황에서 때때로 타인의 전략을 모방하거나 변형해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은 한니발의 전략을 면밀히 학습해 장점을 모방하고 약점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한니발을 이겼다. 일본의 도고 원수 또한 적장이었던 이순신 제독의 학익진과 일자진을 응용한 도고 턴으로 러시아를 이겼다. 프로이센의 블뤼허 사령관은 나폴레옹군에게 패전한 경험을 통해 배운 중앙 배치 전략으로 나폴레옹을 격파했다. 반대로 명나라는 사르후전투에서 막대한 병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분산과 집중에 실패해 패배했다.
기성복 디자인은 유행을 따라 거의 비슷하게 변화한다. 그러다 보니 여성복 치마 길이와 경기가 반비례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디자인이 서로 비슷해지는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남과 다르게 튀는 데서 오는 위험을 회피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니면 다른 디자인의 좋은 점을 서로 베끼다 보니 비슷해질 수밖에 없게 됐을 수 있다. 옆에서 같이 경쟁하는 식당이 고객에게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면 나도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든지 디저트를 무료로 제공하든지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야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는다.
2020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바이든 후보는 공화당 아성이었던 조지아주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깜짝 놀란 트럼프 후보가 조지아주 국무장관에게 전화해 ‘도둑맞은 내 표를 찾아내라’고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민주당은 선거운동원들이 가가호호 방문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맨투맨 전략을 써서 큰 효과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024년 트럼프 후보는 바이든 방식의 맨투맨 전략을 그대로 베껴 써서 조지아주를 탈환하고 대통령에 재선됐다. 해리스 후보가 전국 단위 방송광고에 집중하면서 상대적으로 경합 주 선거 운동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트럼프 후보는 조지아주에 한정하지 않고 경합 주 모두에서 맨투맨 전략을 썼다.
이처럼 필요하면 상대방의 전략을 베껴야 한다. 전투에서도 적군이 탱크를 동원하면 아군도 탱크를 동원해야 전투력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전쟁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적군이 썼던 전략 전술을 그대로 베끼거나 약간 변형된 형태로 베껴서 성공한 사례들이 있다. 로마 장군 스키피오는 적장 한니발의 전술을 철저하게 연구해 한니발의 장점은 베끼고 약점은 약점대로 파고드는 전술로 결국 한니발에게 승리를 거뒀다. 일본 해군의 도고 헤이하치로 원수는 313년 전 해전에서 적장 이순신 제독이 썼던 기동 전술을 응용해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상대로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다.
1. 한니발을 모방해한니발을 이긴 스키피오누미디아는 아프리카 북부의 알제리, 튀니지 지역에 거주하던 기마민족으로 베드윈족의 선조라고 보면 된다. 베드윈족은 북아프리카에 진출하려는 유럽 세력에 맞서 싸우면서 이름을 떨쳤는데 베드윈족 기병대가 프랑스 외인부대와 전투하는 장면이 여러 영화에 등장한다. 누미디아는 기마민족답게 강력한 기병부대를 보유했다. 한니발은 로마 원정에 나서면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누미디아 기병대를 용병으로 고용했다. 누미디아 기병대는 칸나이 전투에서 초승달 진형의 양 날개에 포진하고 있다가 로마군을 포위해 섬멸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로마 장군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머무르면서 반로마동맹을 결성하는 노력을 하는 동안 카르타고 본국을 직접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로마로 진격했던 경로를 거꾸로 해 카르타고에 상륙했다. 한니발군은 이베리아(지금의 스페인 지역)를 근거지로 해서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로 진격해왔는데 스키피오는 1단계로 4년에 걸친 전쟁을 통해 한니발의 동생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베리아를 평정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의 후방 기지라고 할 수 있는 이베리아를 먼저 점령해 한니발을 고립시키는 한편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카르타고에 상륙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카르타고 정부가 한니발을 소환하자 한니발은 그간에 이룩한 모든 것을 버리고 이탈리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고에 돌아온 한니발 군대는 기원전 202년 자마(Zama)에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과 격돌했다. 자마 전투 직전에 한니발은 스키피오와 만나 카르타고 밖의 영토에 관심을 갖지 않을 테니 강화조약을 맺자고 했다. 하지만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스키피오는 “당신이 이탈리아반도에 있을 때 강화를 요청했다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군이 카르타고에 온 이상 사정이 달라졌다. 카르타고의 무조건 항복을 원한다. 싫으면 전투에서 나를 이겨야 한다”며 거절했다.
자마 전투의 결과는 로마군의 압승이었다. 로마 병사는 직사각형 모양의 개인 방패와 창, 짧은 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긴 창을 든 카르타고 병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했다. 방패와 창으로 긴 창을 피하면서 가까이 다가가서 긴 창을 들고 있는 게 거추장스럽게 만든 후 짧은 칼로 찌르는 새로운 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니발군은 오랜 원정으로 나이가 든 병사가 많았고 여전히 이민족들이 용병으로 참여하고 있어서 응집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결정적으로는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용병이었던 누미디아 기병대가 자마 전투에서는 스키피오의 용병으로 활약했다. 누미디아 기병 2000명은 한니발 진영에 참여했고 누미디아 기병 4000명은 로마군 진영에 가담했다. 누미디아에 2명의 왕이 있고 각자 행동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로마군 기병대 숫자가 카르타고군 기병대 숫자보다 많았다. 칸나이 전투에서는 카르타고군의 기병대 병력이 로마군 기병대 병력보다 많았지만 자마 전투에서는 그 반대가 됐고 기병대를 잘 활용하는 한니발이 특기를 발휘할 수 없었다.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누미디아 기병대를 좌우 양 날개에 배치했지만 로마군에 배속된 누미디아 기병대도 역시 로마군의 좌우 날개에 배치됐다. 로마군에 배속된 누미디아 기병대의 숫자가 더 많은 상황에서 기병대의 기동력과 충격력을 활용한 한니발의 포위 작전이 먹힐 리 없었고 오히려 로마 기병대가 카르타고군을 가뒀다. 누미디아 보병 6000명도 로마군에 가담해 힘을 보탰다. 이는 용병에 의존했던 카르타고군의 약점이 그대로 노출된 장면이었고 한니발의 로마 정복이 왜 실현될 수 없는 꿈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준 장면이었다.스키피오는 카르타고 원정에 앞서 누미디아 사람들을 포섭해 로마 진영으로 끌어들여 한니발에게 결정타를 먹일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한니발의 기병 전술과 용병 활용 전술과 같은 장점을 베끼고 약점은 파고드는 전략으로 큰 승리를 거둔 스키피오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프리카누스(Africanus)’라는 존칭을 얻었다.
2. 적장 이순신의 전술에서 탄생한 도고 턴1905년 쓰시마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러시아 발틱 함대에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일본 해군이 승리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일본 해군의 장비가 러시아보다 신식이었다. 예를 들면 도고 원수가 타고 있던 기함 미카사는 영국 비커스(Vickers)사가 제조한 최신식 전함이었다. 영국 해군이 보유한 전함보다 성능이 좋아서 영국 의회에서 논란거리가 됐을 정도였다. 비커스는 일본 해군이 부러우면 국방 예산을 새로 편성해서 구매하라고 배짱을 부렸다. 둘째, 일본이 함포사격의 신속한 장전과 명중률에서 러시아보다 앞섰고 먼 길을 온 러시아 장병들은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여서 집중력이 필요한 함대 포격전에서 집중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셋째, 중간 기착지에서 프랑스, 독일, 영국의 비협조로 군함 바닥 청소 등 정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러시아 군함의 움직임이 전반적으로 느려지고 둔해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이유는 일본 함대가 진행 방향을 발틱 함대의 진행 방향에서 90도 각도로 설정해 발틱 함대의 종대 진형을 일본 함대의 횡대 진형으로 막아서는 새로운 기동 전술(T자 전법 또는 丁자 전법)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발틱 함대의 선두에 선 적함에 모든 일본 전함의 포격이 집중되도록 해 종대로 움직이는 발틱 함대의 전함을 선두부터 1척씩 격파해 나가는 새로운 전술이었다.
이처럼 일본 함대의 진행 방향을 90도 각도로 유지하는 함대 기동을 일본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 원수의 이름을 따서 ‘도고 턴(Turn)’이라고 한다. 도고 턴은 도고 원수의 참모장교였던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고안한 전술인데 1592년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 해군의 이순신 제독이 일본 함대를 격파할 때 사용했던 학익진 대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본 함대가 일자진 형태로 배치돼 종대로 들어오는 러시아 함대를 마주한 것은 오히려 1597년 명량해전의 조선 함대 일자진을 연상케 한다. 도고 턴은 이순신 제독의 학익진과 일자진을 함께 참고해 고안된 기동 전술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당시 일본 해군은 16세기 말 동아시아 전쟁에서 일본 함대를 연파하며 크게 활약했던 이순신 제독의 전술을 많이 연구했다. 일본 해군에는 이순신 제독이 세계 최고의 해군 지휘관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메이지 시절 해군 이론가인 사토 데쓰타로 제독은 서양 최고의 해군 지휘관으로 인정받는 네덜란드의 미힐 더 라위터르와 이순신을 비교하고 이순신이 더 위대한 해군 지휘관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16세기 말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조선 해군이 없었다면 일본군은 서해를 돌아 한양에 상륙해 조선 조정의 숨통을 누르고 중국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쓰시마 해전이 끝나고 서방의 기자들이 도고 원수를 동양의 넬슨이라고 치켜세우자 도고 원수가 이순신 제독을 언급하며 본인은 이순신 제독에 훨씬 못 미친다고 발언했다는 야사가 있는데 확인이 되지는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도고 원수가 이순신 제독을 존경했다는 것이다. 도고 원수는 쓰시마해전을 앞두고 통영에 있는 이순신 제독의 사당을 방문해 분향하고 제사를 지냈다. ‘일본의 운명을 건 이번 해전에서 학익진과 일자진을 응용하고자 하니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지 않았을까. 도고 원수는 약 313년 전 일본의 중국 정벌 계획을 좌절시킨 적장 이순신 제독을 존경하고 그의 전술을 응용해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파해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발판을 마련했다.3. 나폴레옹의 전술로나폴레옹 격파한 블뤼허1) 나폴레옹의 중앙 배치 전략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군사 천재로 인정받고 있다. 포병의 화력과 기병대의 기동력을 활용하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했으며 특히 전투의 흐름을 파악하고 예비대를 투입하는 시점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나폴레옹은 사전에 치밀한 전투 계획을 수립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들며 무수한 질문을 퍼부어 부하 장교들이 ‘질문쟁이’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참모장(chief of staff)이라는 개념을 군대 조직에 처음으로 도입했고 그가 창안한 중앙 배치 전략(strategy of central position)은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의 적군을 격파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으로 군사학에서 인정받고 있다.
나폴레옹은 수많은 전투에서 중앙 배치 전략을 구사해 큰 성공을 거뒀는데 이 전략의 핵심은 적군의 부대 사이의 간극을 파고들어 아군의 주력을 배치하고 적군을 양분해 한쪽은 소수의 병력으로 견제하면서 시간을 벌고, 나머지 한쪽에 공격을 집중해 격파한 후 이어서 견제하던 다른 한쪽도 격파한다는 ‘적군 분리 후 각개격파’ 개념이다. 포병의 화력 집중, 기병대의 신속한 기동이 이 전략의 핵심 요소이다. 이 전략은 나폴레옹 시대 이후에도 응용됐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타넨베르크전투이다. 독일군은 러시아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큰 사실에 주목하고 제1군과 제2군을 시차를 두고 각개격파했다.
나폴레옹이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중앙 배치 전략을 응용해 거둔 압승은 그의 천재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나폴레옹은 진지를 구축하면서 일부러 우익의 진지를 멀리 떨어진 장소에 구축했다. 물론 병력도 상대적으로 적게 배치해 적군의 눈에 프랑스군 진영의 약점으로 비춰지도록 했다. 이는 적군으로 하여금 프랑스군 우익 돌파를 시도하도록 유인한 것이었다. 적군은 예상대로 프랑스군의 우익을 돌파하려고 시도했지만 전투 지역의 지형상 적군이 프랑스군 우익으로 진격하면 적군 공격 대열의 우측이 프랑스군에 노출되는 문제가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의 우익 진지를 공격하는 적군의 오른쪽에 병력을 투입해 적군을 둘로 나누는 데 성공한 후 프랑스 우익 진지의 저항에 가로막힌 적을 견제하면서 반대편에 고립된 적군을 신속하게 격파했다. 이어서 우익 진지를 공격하는 적군을 포위하자 적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얼어붙은 호수 위로 달아나는 적군에게 포격을 집중했다. 얼음이 깨지면서 달아나던 적군은 모두 익사했다.
2) 나폴레옹을 베낀 블뤼허의 순발력:워털루전투의 전환점워털루전투의 전초전 격인 리니전투에서 나폴레옹군에게 패배한 프로이센군 사령관 블뤼허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나폴레옹 휘하의 그루시 원수가 3만3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철수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고 있는 상황을 역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병력의 일부는 계속 철수하게 해서 그루시가 철수하는 프로이센 병력을 주력 부대로 착각해 계속 추격하도록 해 나폴레옹군 본대와 멀어지게 했다. 한편 프로이센군 주력은 반대 방향으로 신속하게 행군해 워털루에 있는 영국군에 합류해서 상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한 나폴레옹군을 일거에 격파한다는 작전 계획이었다. 이 작전은 나폴레옹이 중앙 배치 전략을 통해 고안한 ‘적군 분리 후 각개격파’ 전술을 응용한 것이었다. 즉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을 분리해 각개격파하려는 나폴레옹의 전술을 거꾸로 적용해 오히려 프랑스군을 두 동강 내고 각개격파하는 전술로 만든 것이었다. 사병부터 시작해서 원수까지 진급한 백전노장인 블뤼허의 순간적인 판단력과 순발력이 돋보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블뤼허는 사단장 시절인 1806년 예나전투에서 나폴레옹군에게 포위돼 항복하고 포로가 된 적이 있다. 나폴레옹에 대한 복수심이 강했던 인물이고 실전 경험을 통해 나폴레옹의 전략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블뤼허는 나폴레옹의 ‘분리 후 각개격파 전술’로 나폴레옹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데 성공함과 동시에 나폴레옹을 완전한 몰락으로 이끌었다. 나폴레옹 입장에서 보면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 그간의 화려한 전적을 모두 말아먹은 모양이 됐다.
3) 나폴레옹 전술로 다시 보는 사르후전투1619년에 있었던 사르후전투는 여진족이 세운 신생 국가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 일어난 전투이다. 후금이 승리함으로써 신생 국가의 기반을 다지게 됐고 대륙의 패권이 한족에서 여진족으로 넘어가는 출발점이 된 역사적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명군이 패배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국가가 이미 기울어 군기가 문란하고 무기 관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전투력이 부족했다. 지휘관들이 서로 반목하면서 협조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가장 결정적인 패인은 병력의 분산과 집중이 적절하게 이뤄지지 못해 병력과 화력이 우세한 명군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는 점이다. 명군은 후금 정벌을 위해 진격하면서 병력을 네 갈래로 분산시켰다. 후금군의 총병력은 5만 명 수준이고 명군은 10만 명이 넘었는데 명군이 분산됨으로써 후금군이 명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명군이 병력을 분산시켜 진격한 것은 보급의 효율성 측면에서 볼 때 이해할 수 있는 조치였다. 당시의 도로 사정을 감안하면 대규모 군대가 함께 움직일 경우 식량 보급 등 물류 관리가 쉽지 않았고 행군 대형 유지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보병 위주인 명군과 기병이 주력인 후금군을 비교할 때 후금군이 기동력을 살리면 명군이 각개격파될 위험이 컸으므로 명군 지휘부는 분산된 상태에서 공격받을 가능성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명군은 집결지를 후금의 수도로 정했는데 병력이 네 갈래로 분산된 상태에서 적군 지역을 행군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명백히 잘못된 결정이었다. 병력이 분산되더라도 적군 지역에서는 다시 합류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데 명군 지휘부는 후금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하고 병력의 분산, 집중에 관해 세밀한 작전을 세우지 않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후금 지도자 누르하치는 정찰대를 풀어 명군의 진격 상황을 자세하게 파악하고 하나씩 차례로 각개격파하는 작전을 세웠다. 분산돼 전진하던 서로군, 북로군, 동로군이 후금 기병대에 차례로 각개격파됐고 후방에 뒤처져서 전진하던 남로군만 겨우 퇴각하면서 사르후전투는 명군의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나폴레옹의 중앙 배치 전략 관점에서 보면 병력이 열세인 후금군은 명군을 분산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했다. 그런데 월등히 많은 병력을 보유한 명군 지휘부가 스스로 병력을 4개의 집단으로 나누는 바람에 후금군이 손쉽게 명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10만 대 5만의 싸움이 순차적으로 벌어진 4개의 2.5만 대 5만 싸움으로 바뀌면서 명군의 병력 우세는 사라지고 후금군의 병력이 우세하게 됐다. 명군의 주력은 보병이고 후금군의 주력은 기병이어서 전투력 격차는 더 벌어졌다. 병력의 집중과 분산을 적절하게 관리해 전투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군사작전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Copyright Ⓒ 동아비즈니스리뷰.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