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단종은 조선 왕조에서 손꼽히는 강한 정통성을 지녔음에도 왕위를 지키지 못했다. 문제는 정통성의 크기가 아니라 그 정통성을 보호할 승계 시스템의 부재였다. 첫째, 수렴청정을 맡을 왕실의 웃어른이 없었고 외척·종친 등 친위 세력도 취약했다. 둘째, 김종서 개인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면서 ‘키맨 리스크’가 커졌고 그의 제거와 함께 단종의 보호막도 무너졌다. 셋째, 세종과 문종은 후계자 교육에는 성공했지만 후계자를 보좌할 인재풀 육성과 잠재적 위협 제거까지 포함한 승계계획은 완성하지 못했다. 결국 승계는 후계자를 정하는 단발성 사건이 아니라 후계자를 지키고 안착시키는 다층적 보호 장치와 인재 승계까지 포함한 장기적 프로세스임을 단종의 비극은 보여준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일명 ‘왕사남’이 천만 관객을 넘기는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의 왕위를 강압적으로 빼앗은 과정, 사육신의 복위 운동이 실패한 후 단종이 폐위돼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일화는 이미 여러 차례 사극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단종의 영월 유배 생활과 엄홍도 등 마지막까지 단종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룬 작품은 없었기에 이번 작품이 신선함을 준다. 그런데 단종을 안타까워하고 세조에게 분노하기 전에 이성적으로 되짚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왜 단종이 왕좌를 지키지 못했냐는 것이다. ‘승계계획(Succession Planning)’의 측면에서 문종에서 단종으로 이어지는 권력 승계가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단종은 선왕 문종의 적장자로서 왕세자를 거쳐 왕이 됐다. 이 같은 사례는 조선 왕조 27명의 군주 중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7명뿐이다. 여기에 대를 이어서 적장자인 경우, 즉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적장자로서 왕세자에 책봉된 후 왕위에 오른 것은 단종과 숙종, 두 임금밖에 없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의경세자의 적차자(嫡次子), 적자 중 둘째 아들이고, 인종의 아버지 중종은 성종의 적차자, 현종의 아버지 효종은 인종의 적차자, 순종의 아버지 고종은 왕족 흥선군의 적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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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나 예법상으로나 적장자 승계가 원칙임에도 막상 이를 충족한 왕은 드물었다. 더욱이 단종은 유일하게 원손-왕세손-왕세자의 단계를 모두 거쳤고 선왕들도 적통으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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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강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처럼 드높은 권위를 가진 단종이 왕위를 빼앗긴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울타리의 부재우선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열리지 못했다.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 할머니 대왕대비나 어머니 대비가 대신 국정을 돌본다. 새 왕이 통치자로서 충분한 역량을 갖출 때까지 왕실의 최고 어른이 후견인이 돼 돕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성종, 명종, 선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 총 7명의 임금이 수렴청정을 받았는데 조선은 이를 공식적으로 제도화해 왕권의 안전판으로 삼았다. 하지만 단종의 경우는 할머니이자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어머니이자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가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렴청정할 사람이 없었다. 만약 두 사람, 특히 소헌왕후가 생존해 있었다면 수양대군은 감히 왕위를 노리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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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편을 든 종친들도 충분히 제어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세종과 문종이 더 오래 살았다면’과 마찬가지로 의미 없는 가정이다. 당시 사람들의 힘으로 바꿀 수 없었던 것을 가정하지 말고 바꿀 수 있었던 것을 가정해야 한다. 그래야 반면교사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단종을 지켜줄 외척이나 종친이 없었던 점이 아쉽다. 흔히 외척은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해 국정을 농단하는 존재로 등장하지만 왕에게는 든든한 친위 세력이기도 하다. 외척이 가진 힘은 왕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왕을 지킨다.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숙종도 즉위 초기에 외가 청풍 김씨 가문과 처가 광산 김씨 가문의 도움을 받아 왕권을 안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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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종의 외가는 중진급 관리인 외삼촌 권자신만 남아 있었고 처가의 세력도 미미했다. 단종의 방패막이가 돼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외척이 힘이 되지 못한다면 남은 선택지는 친척들의 힘, 왕실 종친의 결집이었다. 그러나 세종의 친형인 양녕대군과 문종의 친동생 임영대군, 영응대군이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등 상당수가 단종에게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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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힘을 가진 적통 대군 중에서 단종의 편에 선 건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과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뿐이었다.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다름 아닌 문종으로부터 뒷일을 부탁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 김종서(金宗瑞, 1383~1453)였다.
김종서의 오만과 독주문종은 눈을 감기 전에 황보인, 김종서 등 삼정승에게 어린 세자를 부탁했다. 수렴청정할 어른이 없기에 대신 정승들을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국정을 책임지는 ‘고명대신’으로 삼아 아들을 보좌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의 중심이 재상으로 넘어가면서 종친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예컨대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삼정승은 ‘황표정사(黃標政事)’로 인사를 좌지우지했다. 최종 후보자 3인 중 삼정승이 선택한 인물에 노란색 표를 붙여놓고 왕은 그대로 승인하는 방식이다. 단종이 아직 어려서 그랬다지만 왕의 최종 결정권을 부정하고 삼정승의 권력을 비대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같은 왕권의 실추에 종친들이 격분했다. 여기에 재상들이 대군들에 대한 분경(奔競, 엽관운동) 금지를 시도하는 등 종친들을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하고 활동을 제약함으로써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안평대군처럼 친(親)단종인 종친도 반발할 정도였다. 여러 종친이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변에 협조하거나 묵인한 이유다. 김종서를 위시한 재상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왕실을 약화하려 든다고 생각하고 신하에게 휘둘리는 어린 유약한 왕이 아니라 신하들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통치자를 원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단종의 정통성은 확고했고 대의명분은 어디까지나 정승들에게 있었다. 정승들이 방심하지 않고 힘을 합쳐 국정을 운영했다면 수양대군 정도는 얼마든지 막아냈을 것이다. 문제는 김종서로부터 시작됐다. 북방 개척의 영웅이며 세종과 황희에 의해 차세대 재상감으로 키워진 그는 행정, 군사, 외교, 학문 분야에서 모두 탁월한 능력자였다. 다만 ‘광패(狂悖)하다’, 거칠고 오만하다고 탄핵받았을 정도로 성격이 모가 나 있었다. 자기 능력에 대해 자부심이 높았던 그는 수양대군쯤은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고, 그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했다.
게다가 김종서는 국정을 장악하고 독선적으로 처리했다. 같은 고명대신이자 선임 재상인 영의정 황보인도 점점 소외됐다. 황보인이 “나는 손님일 뿐”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낼 정도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김종서의 눈높이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동료 대신들이 무능해 보이고 믿음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어린 임금을 부탁한 주군 문종을 생각해서라도 일일이 다 챙겨야 안심이 됐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김종서의 태도는 ‘키맨 리스크(Key Man Risk)’를 불러온다. 김종서 한 사람에게 권한과 의사결정이 과도하게 집중되다 보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라 전체가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수양대군이 제일 먼저 김종서를 공격한 이유, 그것도 김종서가 방심한 사이를 노려 피습한 이유도 그래서다.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 김종서 같은 이가 없다. 만약 저 사람이 알게 되면 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그를 베고 나면 나머지는 평정하고 말 것도 없다”6
라는 수양대군의 말 속에는 당시 조정의 취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실제로 김종서가 쓰러지자 조정은 순식간에 수양대군의 손에 넘어갔다. 영의정 황보인 등 대신들이 참살됐고, 삼도 도체찰사로 지방을 순시하고 있던 우의정 정분이 끌려와 죽임을 당했으며, 단종을 지지했던 안평대군이 사약을 받았다. 김종서가 단종의 든든한 방패였음에는 분명하지만 왕을 보호할 힘을 오로지 그 혼자서 가지고 있었기에 그가 쓰러지는 순간 보호막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만약 김종서가 혼자 모든 것을 떠맡지 않고 유사시 단종을 보위할 시스템을 구축했다면, 자신이 없더라도 역적을 제압할 수 있는 경호 체계를 만들어놓았다면 어땠을까?
전임자의 실수다음으로 단종이 찬탈당한 원인은 선왕들에게도 있었다. ‘승계계획’이 성공하려면 후계자뿐 아니라 후계자와 함께 일할 핵심 인재들의 승계도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기업에서 새로 최고경영자가 취임할 때 최고재무책임자, 최고운영책임자, 최고인사책임자도 준비돼야 신속히 조직을 장악하고 차질 없이 경영할 수 있듯이 말이다. 세종 시대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황희, 맹사성, 허조, 신개, 명장 최윤덕 등은 모두 태종이 발탁해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세종을 위해 안배한 인물들이었다. 세종 시대를 떠받친 조말생, 하연, 변계량, 안순도 마찬가지다.
이에 비해 단종이 선왕들로부터 물려받은 신하 중 조정을 책임질 만한 인물은 김종서와 황보인 정도였다. 정분, 허후, 김문기, 조극관, 민신 등 훌륭한 인품과 행정 능력을 갖추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바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평화로운 시기의 행정가에나 어울리는 인물이지 위태로운 시기를 헤쳐 나가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심지어 정창손, 정인지, 이계전, 이계린 등 다른 판서급 대신들은 잡음을 많이 일으켰을 뿐 아니라 권력의 향방을 좇아 수양대군 편을 들었다.
이는 세종이 만년까지 70~80대의 원로 재상들에 의지해 정치를 해나가면서 다음 세대를 맡을 중진급 인재를 충분히 키워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실무를 맡아봤을 뿐 대신으로서의 안목이나 정치력을 검증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아버지 못지않은 성군의 면모를 보였던 문종이 상당 기간 재위했다면 보완됐을 문제지만 문종이 즉위한 지 2년 만에 승하하면서 조정은 리더십 공백과 인재 공백을 동시에 겪게 된 것이다.
인재를 키우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후계자에게 위협이 될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지 못한 점도 전임자의 실수였다. 세종은 수양대군의 야심을 알았음에도 이를 뿌리 뽑지 않았다. 수양대군의 군호는 원래 ‘진양(晉陽)’이었다. 1445년 세종이 이를 ‘수양(首陽)’으로 고치게 했는데 충절의 상징인 백이와 숙제가 은거해 죽은 ‘수양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마도 세종은 아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형과 조카에게 계속 충성을 바치길 바랐던 것 같다. 수양의 야심을 읽은 것이다. 그렇다면 태종이 양녕대군을 지방에 유폐하는 등 세종의 왕권에 방해가 되는 요인들을 모두 제거했듯이 세종도 그런 조처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러한 점들은 문종의 실수이기도 하다. 문종이 세종의 삼년상을 치르고 본인이 병석에 누워서 여력이 없었더라도 수양대군을 무력화하고 수양대군을 지지할 만한 대신들을 솎아 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요컨대 단종의 비극은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어린 임금을 지켜줄 궁궐의 웃어른이 없었고, 왕의 친위 세력이 돼 줄 외척과 종친이 부족했으며, 김종서의 독선이 내부 분열을 초래했고, 김종서 1인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위기를 심화시켰다. 세대교체에 실패하고 왕권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지 못한 전임자들의 실수가 중첩되며 초래한 것이다. 이 중에서 어느 하나만 달랐더라도 우리가 아는 역사 역시 바뀌었을 수 있다.
경영학에 “승계는 이벤트가 아니라 프로세스다(Succession is a process, not an event)”라는 격언이 있다. 정통성 있는 후계자를 정하고 그 후계자를 미리 교육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승계계획’이 완성되지 않는다. 찬탈의 위협으로부터 계승자를 보호하고 리더로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그를 보호하는 장치를 다층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설령 하나가 타격을 받더라도 다른 장치가 작동해 리더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김종서의 사례처럼 어느 특정인에게 조직과 리더의 명운이 모두 달리게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아울러 전임자는 후계자가 안정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태종이 세종을 위해 외척과 공신을 제거하고 왕권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양녕대군을 완전히 무력화했듯이 후계자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미리 제거할 필요가 있다. 후계자를 보좌할 능력 있는 인재풀을 육성해 넘겨주는 것도 중요한데 단종에게는 이 같은 ‘승계계획’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정통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통성을 지켜줄 시스템이 부족했던 탓에 가슴 아픈 비극이 초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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